살며 사랑하며/농부와 독서

촐라체 - 박범신

금오귤림원 2010. 8. 24. 23:22

지은이 : 박범신
- 1946년 충남 논산 출생
-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단편 [여름의 잔해] 당선

-2008년 3월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저서 :
[흰 소가 끄는 수레], [토기와 잠수함]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불의 나라], [침묵의 집]
[외등], [더러운 세상], [나마스테]
[젊은 사슴에 관한 은유], [사람으로 아름답게 사는 일]
[남자들 쓸쓸하다], [비우니 향기롭다]
[카일라스 가는 길],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 등

대한민국문학상(1981)
김동리문학상(2001)
만해문학상(2003)
한무숙문학상(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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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판 1쇄 발행 : 2008. 8. 5
- 펴낸 곳 : 도서출판 들녘
- 주소 : 경기 파주 교하 문발 파주출판단지 513-9
- 363쪽 / 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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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였던가? 그로부터 박범신이라는 이름을 기억했다. 우연히, 텔레비젼을 보다 히말라야라는 배경과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여기 저기 돌던 티븨 채널은 고정되었었고, 끝내 서점으로 달려가 그 책을 사서, 조금은 지루하게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때만 하더라도 김진명님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시작하여, 『살수』등 김진명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마치 장쾌한 무협지를 읽듯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던 때라 박범신님의 그 책은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주인공이 겪는 한국사회에서의 따돌림 문화, 말로는 인화를 외치고 평등을 수도없이 외치지만, 끝도없이 기만하고 거짓이 몸에 배어 오히려 그 거짓이 진실이 되어버린지 오랜 한국사회의 모습에 소설속 주인공보다 더한 분노를 느껴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책이기도 했다.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에게 인사를 드립니다.」라는 의미를 갖는 "나마스테", 히말라야를 중심으로 펼쳐진 그 곳(네팔) 주민들의 삶속에 이미 깊게 파고들어, 우리들의 일상화된 그런 거짓과 위선만큼이나 그러나 우리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 정 반대의 모습으로 가난하고 볼품없는 그 곳 주민들에게 일상이된 인사말이라 했다. 우리들에게 있어 「안녕하세요?」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들은 마음을 다해 두 손을 서로 맞대 합장을 하며 머리를 숙여 인사한다고 했다. 좁은 생활공간속에서 숱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러나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삶의 모습. 내 방식만이 오로지 유일무이하다는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도 달라 선듯 이해가지 않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보다 더한 배려와 마음 씀씀이가 또 있겠는가?

중동 아랍지역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문화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기독문화의 충돌은 이미 수세기를 뛰어넘어 아직도 굳건하게 대립하고 있는 요즘세상에서, 자연속에 존재하는 숱한 생명체들의 숫자보다 더 많은 신들을 섬기며 살아가는 그들의 북적대는 삶속에서 서로 대립하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고 인정하는 삶의 모습을 그 때 책을 읽으며 느꼈었고, 그들의 찢어지게 가난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부러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부럽다기 보다 오히려 동경했을 정도로...

그리고 오늘, 두 번재로 박범신님을 만났다.
역시 히말라야가 이 소설의 배경이 되었다. 박범신님에 대해, 잘 모른다. 구태여 그에대해 소상히 알아두어야 할 이유가 내겐 없기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의 배경에 대해, 그의 소설에 대해, 미리 알고 싶지 않기도 하지만, 작가에 대해 미리 이것 저것 알아두면, 작품에 대해 바르지 못한 선입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무튼, 난 사람 그 자체에 대해, 특히 그 사람의 사적인 생활 등에 대해 별반 관심을 갖기 싫다. 그저 그의 작품을 통해 조금 엿 볼수 있다면 좋을까!

책 전체의 내용을 이끌어가는 화자 「나」, 정선생과 이미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주인공 박상민, 그리고 하영교. 이렇게 세사람이 등장인물의 전부였지만, 그래도 "나마스테"보다는 읽어 내리기가 조금은 덜 부담스러웠다. 그만큼 나마스테는 정적이었다고나 할까?

아니, 어쩌면 실제인물인 박정현과 최강식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이, 비록 책을 읽어 나가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긴 했지만, 알게 모르게 그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그나마 조금은 박진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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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 책도 한라도서관에서 대출을 받아 읽었다.
딱히 박범신이라는 이름도, 김진명이라는 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아, 개가식 서가 중 한국문학으로 분류된 곳을 서성이다 아무 생각없이 뽑아들기도 했지만, 뽑아 든 그 순간에도 책 이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산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저 동네 언덕정도의 제주오름을 좋아하고, 기껏해야 정상적인 등산 루트를 따라 한라산 정상정도만을 좋아하기에 히말라야와 같은, 암벽등반이라든지 하는 등의 전문산악인들에게 있어 이미 상식일정도의 산 이름이나 암벽이름, 계곡이름과는 거리 또한 멀었기에 『촐라체』라는 책 제목은 정말 알 수 없는 암호였다.
 
하기야, 책을 뽑아들고서도 내리 휘갈겨 쓴 서체때문에 그 글자가 촐.라.체임을 알지도 못했다. 표지를 겉고, 다시 몇 장을 겉어 낸 후, 아주 작은 글씨로 촐라체, CHOLATSE라 쓰여진 글씨를 보고서야 비로서 책 제목이 촐.라.체임을 알아 차렸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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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성 산악인 오은선 대장의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대해 한동안 떠들썩 하다 잠잠하더니 오늘 아침 뉴스에 다시 그 이름이 들먹거린다. 해발 8,000m 이상의 세계 고봉 14좌 중 10번째로 등반한 3번째 고봉 칸첸중가의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 거짓이라는 대한산악연맹의 발표가 다시금 그녀를 매스미디어의 중심에 놓고 있는 것이다.

14좌 완등의 의미... 무엇이 이 사회를 그토록 믿지 못하도록 하는가! 참으로 가소롭기도 하고, 실소가 입가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 하긴 이 사회 깊숙한, 심저 뿌리에는 다른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참으로 못나고도 못난, 정말 더럽고도 더러운 기질이 꿈틀거리며 호시탐탐 공격거리를 찾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어쩌면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오로지 자신의 생명만을 세상 최고의 가치로 삼을 수 밖에 없는 생존의 몸부림일수도 있겠다. 서른 여섯해 동안, 잔인하고도 비 인간적인 일본제국주의의 참담함을 겪은것도 불과 100여년 전이고 보면, 거기에 서로를 죽여 오로지 나만 존재하겠노라 벌였던 6.25 한국전쟁도 불과 60여년전... 구태어 고대, 근대사의 외침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불과 100여년 사이에, 아직 그 일제 시대나 6.25 전쟁을 겪은 이들이 살아 있을만큼 가까웠던 시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참담함을 겪은일들을 생각해 보자면 이해가 아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더해 제주는 4.3 이라는 사건도 겪었다.) 그러나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그냥 인정하면 아니 될 것인가? 그렇게 하염없이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다가 훗날, 어떤 다른이가 오은선 대장과 같은 코스로 같은 형태의 기록을 남겨 사실임을 입증하면 어찌 할 것인가? 하긴, 그 건 그 때의 일이다. 이 역시 우리사회가 갖는 고질적인 병폐가 아니겠는가! 어차피 책임질 사람은 없는 사회고 보면, 무엇이라도 부정하고, 따지고 해야 내가 그 보다 더 우월함을 과시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긴, 오은선 대장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 외국의 어느 저명한 등산가였다면, 추측컨대 아마도 이런 괴담수준의 힐난과 부정, 시비거리... 이런것들은 시작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칭찬 일색에, 우리는 어찌 이런 이가 없는가라는식의 이야기가 대세를 이루지 않았을까? 아마도 사실일것이다. 왜냐구? 지금껏 우리의 과거를 조금만 되돌아 보면, 이런 예는 수도없이 쏟아져 나올테니 말이다.)

에휴. 그만 하자. 하다 보면 끝이 없을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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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적은김에, 그래 세계 최고의 8,000m 이상 고봉 14좌를 적어나 보자.

에베레스트, K2, 칸첸중가, 로체, 마칼루, 초오유, 다울라기리, 마나슬루, 낭가파르밧,
안나푸르나, 가셔브룸I, 브로드피크, 가셔브룸II, 시샤팡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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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서남서 17Km, 남체 바자르 북동북 14Km 지점에 위치한 6,440m 봉우리 촐라체를 극지 등반법이 아닌 순수 알파인 등반법을 이용한 등정으로는 세계최초!!!, 전 세계 젊은 클라이머들이 오르기를 열망하는 꿈의 빙벽 북벽을 등반 정상을 밟은 후 돌아오다 크레바스에 빠져 거의 죽음을 경험하고 살아 귀환한 박정헌, 최강식이라는 산악인의 실화를 모티브로 하여 쓰여진 이 소설에서 작가는

'존재의 나팔소리'에 대해 썻고 '시간'에 대해 썼으며,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대해, 불멸에 대해 썼다.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현대인에게, 또는 자본주의적 안락에 기대어 너무 쉽게 "꿈"을 포기하는 젊은 내 아이들에게 들려 주고자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것은 숨기고 싶지 않다

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어지간한 자극. 비록 그것이 죽음을 넘나드는 정도의 강력한 자극이라 할 지라도, 이미 어느정도의 자극에는 익숙해져 버린 요즈음 젊은이들이나 나이 든 이들이나,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상태로 단지 소설형식을 통해 작가의 그 희망이 전해질 수 있을런지는 정말 미지수다.

어쩌면, 그냥 "소설일 뿐이야"라고 치부해 버리지나 않을까?

오은선의 등정이 거부당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부정적 인식은 작가의 짙은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진심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아이스크림 포장지 버려지듯, 그렇게 쉽게 버려지지 않을까. 아이스크림 포장지는 그것이 벗겨지기전에는 손님의 이목을 끌기 위해 온갖 화려함으로 감싸져 있지만, 손님의 손에 들어간 순간,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오로지 벗겨져 버려질 뿐이다.

오히려 그렇게 버려질 것 같다. 그것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애처럽고 또 안타깝다.

또 다시 답답함이 밀려온다.
느끼고 있지만, 마치 손에 닿을 듯 그렇게 내 가까이에서 느껴지고 있지만, 어찌 해 볼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이 안타깝고
이 사회의 그것이 애처럼고 안타까워

다시금 갑갑하고 답답함이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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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죙일...
독후감만으로 시간을 버릴 참인가.

이 정도 하자.

현실은, 과수원 풀베기, 도장지 전정 정리, 콩밭 풀매기, 방제작업....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하기만 하구먼.....

그래도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