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농부와 독서

장외인간 - 이외수

금오귤림원 2010. 9. 12. 22:35

작가 : 이외수

1946년 경남 함양군 출생
춘천교대 자퇴 후 홀로 문학의 길을 걸어옴.
1975년《세대》에 중편소설 「훈장」으로 데뷔.

『독특한 상상력, 기발한 언어유희로 사라져가는 감성을 되찾아주는 작가 이외수. 특유의 괴벽으로 바보같은 천재, 광인 같은 기인으로 명명되며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문학의 세계를 구축해 온 예술가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아름다움의 추구이며,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술의 힘임을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문학과 독자의 힘을 믿는 그에게서 탄생된 소설, 시, 우화, 에세이는 해를 거듭할수록 열광적인 '외수 마니아(oisoo mania)'들을 증가시키고 있다. 그는 현재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감성마을에 칩거, 오늘도 원고지 고랑마다 감성의 씨앗을 파종하기 위해 불면의 밤을 지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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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1쇄 : 2005년 8월 22일
초판 11쇄 : 2008년 4월 20일
제2판 2쇄 : 2008년 9월 20일

펴낸곳 : (株)해냄출판사
주   소 :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368-4 해남빌딩 5.6층

1, 2권 각 263쪽, 266쪽 | 각권 9,500원

《훈장》, 《꿈꾸는 식물》, 《겨울나기》, 《장수하늘소》, 《들개》, 《칼》, 《사부님 싸부님》, 《내 잠속에 비 내리는데》, 《말더듬이의 겨울수첩》, 《풀꽃 술잔 나비》, 《벽오금학도》, 《감성사전》, 《황금비늘 1, 2》,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외뿔》, 《괴물 1, 2》, 《내가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 《날다 타조》, 《바보바보》, 《뼈》, 《장외인간 1, 2》, 《글쓰기의 공중부양》, 《숨결》, 《그대 이름 내 가슴에 숨쉴 때까지》,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 《하악하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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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라는 이름을 언제 들었었던가! 기억은 흐물거리지만, 어찌됐든 꽤 오래전임은 틀림이 없다. 아마도 김진명이나 김홍신, 그리고 박범신이라는 이름을 알기 보다도 훨씬 더 이전이었던것 같다. 물론 문학을 꿈꿨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내가 일부러 그의 이름을 찾아 관심을 두었었던것은 더더군다나 아니었고, 그저 귀동냥이랄까? 아니면 매스컴을 통해서였을까.

어찌 되었던 첫인상은 그리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중광스님도 생각이 난다. 아마도 중광스님, 그 걸레스님과 견줄만큼의 독특했던 그의 겉모습때문에 호감보다는 거리감을 느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참 이상스런것이, 중광스님에 대해서는 그리 거부감이 없었는데 유독 그에게서만 거부감을 느꼈던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그 날도 그랬다. 책 반납일자일에다가 그날따라 연기되었던 농업마이스터대학 수업이 있었기에 먼저 책을 반납하고 학교에 가려고 한라도서관을 먼저 찾았었다. 그간의 일기가 고르지 못했기에 우선은 밀린 농작업을 생각해야만 해서 이번 주는 대출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막상 반납을 하고나니 뒤가 허전했다. 부랴 부랴, 급히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들고 나오긴 했는데 그 책이 바로 이 책이었고 결국은 첫 장을 넘기자 마자 2권 마지막 페이지까지 숨넘어갈 듯 다 읽어 버리고 말았다.

김진명이나 김홍신의 문체와는 또 달랐다. 물론 박범신의 그 지루했던 「나마스테」와도 물론 달랐다. 그들에게서는 평범한 이들과는 다른 색깔이, 다른 냄새가 배어 있었지만, 이 이에게서는 그저 평범한 이웃 아저씨의 냄새가 뭍어났다.

아! 작가. 소설가에게서도 이런 냄새가, 이런 색깔이 나올 수 있구나. 다르지 않으면서도 다른 면.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은 면. 어쩌면 나 역시 그와 같아질 수 있을까? 문체가 되었건 일상의 말이 되었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일상의 말이라면 더더욱이나 배울것들이 많을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작가의 생각이, 관념이, 신념이, 의지가 이 소설의 내용과 같다면, 내면의 의지가 이 소설로 표현이 되었다면, 적어도 난 구원을 받은 셈이다. 내가 만일 이 소설속의 주인공이라면, 작가는 어쩌면 소요이거나 황학선인이리라. 그에 대한 첫인상이자 겉모습은 나의 그에대한 판단을 흐리게 했지만, 결국 그의 이 소설로 인해, 비록 첫 대면이기도 하지만 완전히 1백 80도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또 모르지. 다른 소설속에서의 그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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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과수원 예초작업중에 라디오에서 '소통학'이란 말이 흘렀었다. 하루종일, 그 '소통학'이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했는데 결국, 이외수님의 문체와도 연결되고 있다. 하긴, 요즈음 세상의 화두는 '소통'이다. 티븨가 되었건 라디오가 되었건(신문은 이미 끊은지 오래이기에, 그 곳은 잘 모르겠다.) 매 시간 그 '소통'이라는 화두가 소개되지 않으면 방송이 안 될 정도로 많은 분량이 쏟아져 나온다.
 
방송중에서는 '권위적'이라는 말이 나왔었고, 그리고 '소통'의 전제조건으로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라는 이야기도 나왔었다. 참으로 많은 말들을 쏟아 내고는 있었지만, 결국은 겉돌기가 아니었을까. 권력을 가진이로부터 그렇지 않은이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기대하기도 어렵거니와, 단편적 지식인과 다분야 지식인 사이의 '소통'은 어디까지 이루어질지도 의심스럽고, 하물며 지식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의 이해와 배려는 어디까지이어야 하는지도 아직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 어떤 결론을 내야 하는 일이라거나 또는 생명을 담보로하는 어떤 일을 함께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냥 스쳐지나거나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았거나 등 그저 평범한 관계라 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겠다.)

실제 권력을 가진이가 되었건 그렇지 않은이가 되었건 '지식'을, 그것도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가진이는 더 넓은 세상을, 더 깊은 세상을 볼 수 있거나 느낄 수 있어 그렇지 않은 이들 보다 한 발자욱 또는 몇 발자욱 앞선 세상에 대해 말을 하지만, 그 말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생소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소통되지 않는 말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어쩌면 오늘, 이외수님의 문체에서 그 답을 찾을 수도 있을것 같다. 아직은 구체적으로 와 닿지는 않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분명 그 어떤 답을 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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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곧 '사람의 감성'이었고 '사람의 정서'이었다. 서양의 역사에서는 공포를 자극하는 감정의 일부분이었지만, 동양의 그것에서는 마음을 풍요롭게하는 엄마의 품이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마음에서 엄마의 품을 버려 버렸다. 아니 어쩌면 버려 버리도록 강요당했다. 물질이 풍요로워질수록 그 풍요로워진 만큼 스스로, 또는 알지 못하는 강요에 의해 그들 마음으로부터 '엄마의 품'을 지워버렸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휘영청 어스레이 어둠을 비추던 달마저 세상에서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연관된 미풍양속도 사라져 버렸으며 언어도 사전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쩌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라 치면 그저 희미한 추억에 불과할 뿐 세상 어디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미움덩어리일 뿐이었다.

오로지 나 혼자서만 알고 있고,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 그야말로 장외인간이 되어 버렸다. 세상 누구보다도 가까운 친구마저도 내가 알고 있는 진실(사실은 나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이들이 모두 알고 있는)이 한낱 정신병자만이 뱉어낼 수 있는 이야기정도로 치부해 버릴정도로 세상은 나 자신을 외딴 세상으로 밀어내 버렸다.

'달'이 없어지던 날, 그녀가 '달'을 알고 있었던 알고 있지 못했던(그러나 그녀는 이미 달을 알고 있었다. 내 의식속에서 그녀와 달과의 관계에 대해 무신경했을 뿐) 그래도 그녀에 대한 내 믿음으로 인해 내가 장외인간임을 알아채지 못했는데, 그녀 마저 달랑 메세지 한통 남겨놓고 떠나 버렸다.

나는, 어느사이엔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고립무원에 빠져버렸다. 나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그러나 그 곳에도 사람들은 있었고, 그 '정신병자'들로부터 조금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세상의 정상인들과는 '달'에 대한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했지만, '정신병자'들과는 그나마 꺼내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학선인을 만나던 날, 엄마 품을 지워버린 사람들과는 달리 작가의 분신(?)인 주인공은 예를 갖춰 그 자신을 나타내고(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예와 배려의 마음에 대해 이미 '바보'라는 말 조차 잊어버릴만큼 무관심 또는 전혀 낯설은, 이해할 수 없는, 잘못된 사고 등으로 익숙해져 있었다.) 그로인해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최인호님의 '상도' 에서 석숭스님의 계영배와 같이 이 소설속에서도 황학선인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와 '정감록'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면 마치 만화책을 읽는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소설을 쓰는 작가들의 공통된 특색일까?

어찌되었건간에 주인공은 그 황학선인과, '달'빛 아래 봉황의 실루엣처럼 은빛 하늘을 유영하던 믿음이자 의지였던 소요에 의해 오로지 물질만이 남아 사람의 정감이 메말라버런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지만,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 남았다. 구원받은 세상은 산간오지였고 어쩌면 모두가 희색 옷으로 통일된, 또 다른 속박의 자유와 감성이 있는 곳이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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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사는 곳이 강원도이고, 소설의 배경이 춘천이다. 춘천의 봉의산과 공지천, 우두산, 후평동, 그리고 소양강.... 모두 내 어린시절 추억이 사무치도록 스며있는 곳이기도 하다. 참으로 가난했던 어린시절. 그 곳 소양국민학교에 6학년 졸업 직전까지 다녔었다. 소양강 다목적땜이 완공된 후, 그 어린나이에 참 먼 거리를 걸어서 다녀왔었던 기억도 새롭고, 우두산 충혼탑 아래서 가족사진을 찍었던 생각이며 사생대회, 용영옥 선생님, 웅변대회, 군부대, 탱크훈련, 총각김치, 소양강에서 스케이트 타다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물에빠져 허우적거리다 겨우 빠져나와 모닥불을 피워 옷가지며 스케이트 등을 말리던일, 미류나무 가지를 꺽어 스틱을 만들어 아이스하키를 맹렬히 즐기던 추억...., 연탄가스를 마셔 죽어가다 동치미 그 시원한 국물을 한 사발 들이키고서야 살아났던 생각, 누님의 연애편지 전달하던 생각, 여름철 소양각에서 수영을 즐기다 익사할 뻔했던 생각.... 소양강 건너편까지는 밧줄을 잡아당겨 배를 띄웠던 생각, 후평동 큰형님댁을 걸어서 다니던 생각, 겨울이면 그 높던 방둑에 올라 비료부대를 눈썰매삼아 미끄럼을 즐기던 생각, 어머니가 싸주신 주먹밥을 친구들앞에 내어놓지 못해 쫄쫄 굶다 그대로 집에 가져갔다가 혼날것을 염려해 뽕나무 밭에 숨어들어 정말 맛있게 먹었던 씁쓸하고 안타까운 추억,

몇 년 전이었던가? 그 그리움에 젖어 결국 옆지기와 내 어릴적 아픈 추억들이 스며있던 그 곳을 찾았었다. 서울에서 경춘선 열차를 타고.... 40여년이 흐른 지금도 그곳은 달라지지 않았었다. 단지 미군부대 쓰레기처리장만이 사라지고 없었을뿐...

내 이야기를 읽고 있는듯한 착각을 했다. 오죽했으면 내 인터넷 별명을 '원시인'이라고 했을까. 스스로 그런 별칭을 사용했었다. 아직도 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조금은 변하자... 그런 의미로 지금은 다른 별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 책의 본문증에서 내 눈길을 끈 부분들을 스크랩하다. --------------------------------

- 서른 두 해를 살아오는 동안 너무나 많은 것들이 사라져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학교 때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들, 딱지와 구슬과 팽이들, 학용품과 신발과 옷가지들, 중학교 때 뻔질나게 드나들던 빵집과 만화방과 오락실들, 자전거와 불량식품과 유행어들, 고등학교 때의 여드름과 빨간책과 낙서들, 참고서와 생활계획표와 문제집들, 대학시절의 술집과 혈기와 울분들, 로터리의 기념탑과 공지천의 팔각정과 변두리의 공터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 그밖에 수많은 것들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나는 사라져버린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제외한다면 그것들은 모두 대수롭지 않았다.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내게는 직접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없었고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내게는 직접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달이 사라져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아무리 하찮은 것들이라도 사라져버린 것들은 모두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그것들이 간직하고 있던 아름다움과 동일한 깊이의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을,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비물질적인 것이든, 하나의 존재는 곧 하난의 아름다움이며 하나의 아름다움은 곧 하나의 아픔이라는 사실을.

- 속담에 의하면 재주는 언제나 곰이 부린다. 그러나 돈은 언제나 왕서방이 챙긴다. 곰은 날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재주를 부리지만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조차 버겁다. 반면에 왕서방은 가족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날마다 최고급 호텔에서 젊은 년들 엉덩이만 주무르고 있어도 재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곰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지랄같은 등식이다.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곰들이 살고 있다. 어떤 곰들은 장사를 하고 어떤 곰들은 직장을 다닌다. 이런 곰들은 근면성실이라는 보증수표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현상유지가 고작이다. 어떤 곰들은 로또에 미치고 어떤 곰들은 주식에 미친다. 이런 곰들은 인생역전의 꿈에 부풀어 계속 투자를 해보지만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빈털털이로 전락해 있다. 어떤 곰들은 도박을 하고 어떤 곰들은 사기를 친다. 이런 곰들은 은팔찌를 기고 자주 감방을 드나들게 되고 결국 늙어서야 자신이 그토록 자만했던 재능이 얼마나 부질없었던가를 깨닫는다. 어떤 곰들은 어린이를 유괴해서 부모를 협박하기도 하고 어떤 곰들은 가정집에 흉기를 들고 들어가 강도질을 학기도 한다. 이런 곰들은 단순무지한 발상으로 한 밑천을 잡아 왕서방처럼 살아보겠다는 생각이지만 바로 눈앞에 인생의 종착역이 기다리고 있다. 근무처에 처우개선을 울부짖으며 분신자살하는 곰들도 있고 아파트에서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살하는 곰들도 있다. 그래도 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세상은 곰들의 지옥이고 왕서방들의 천국이다.

- 그녀는 하늘이 맑은 날만 소주 한 병을 서비스로 갖다 주지는 않았다. 하늘이 맑은 날은 하늘이 맑기 때문에, 반대로 하늘이 흐린날은 하늘이 흐리기 때문에, 소주 한 병을 서비스로 갖다 주었다. 그녀는 서비스로 나간 소주값을 기록해 두었다가 자신의 월급에서 공제하겠노라고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전략을 그대로 도입해서 하늘이 맑은 날은 하늘이 맑다는 이유로 손님들에게 소주 한 병을 서비스로 진상하고, 하늘이 흐린 날은 하늘이 흐리다는 이유로 손님들에게 소주 한 병을 서비스로 진상하는 전략을 고수했다. 의외로 효과가 좋았다. 당연히 서비스로 나간 소주값을 그녀의 월급에서 공제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명함 뒷면에 생일을 적어준 손님에게는 정말로 생일카드를 직접 만들어 보내주는 세심함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일을 자발적이고도 창의적으로 잘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대체 잔소리를 늘어놓을 건덕지가 없었다. 그녀는 단골들의 성격과 취미와 습관따위들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카운터 앞에서 계산을 할 때면, 등산을 좋아하는 손님에게는, 삼악산한테 안부 전해 주세쇼, 라는 멘트를 날렸고, 재즈를 좋아하는 손님에게는, 저도 카산드라 윌슨을 좋아한답니다, 라는 멘트를 날렸다. 그녀는 아무리 성격이 까다로운 손님도 금불알을 찾아오기만 하면 단골로 만들어버리는 수완을 가지고 있었다.

- 그녀야말로 달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녀는 달을 보면 디오게네스가 생각난다고 말 한 적이 있었다. 인간다운 인간을 찾기 위해 대낮에도 등불을 밝히고 다니던 디오게네스. 그녀에게 있어서 달이라는 천체는 지구를 진실로 지구답게 만드는 등불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는 달맞이꽃은 디오게네스가 한 번씩 등불을 새로 밝힐 때마다 피어난 꽃이었다.

어느 날 그대가 문득
하늘을 보았을 때
거기 보름달 하나가 걸려 있거든
내가
친구의 가슴에서 호수를 꺼내
거기 걸어두었음을 기억하소서.
                호부월선(湖夫月仙)


- 가을이 떠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영양가 없는 잡념들이나 굴리면서 무료한 시간을 소일하고 있던중이었다. 제과점 앞에서 붕어가 들어 있는 붕어빵을 파는 장사꾼과 피자집 앞에서 빈대가 들어 있는 빈대떡을 파는 장사꾼은 어느쪽이 더 빨리 망하게 될까. 성탄절에 신도가 많은 교회에 재림해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예수님과, 불탄일에 신도가 많은 절간에 나타나서 마음을 비우라고 외치는 부처님은 어느 쪽이 더 빨리 몰매를 맞아 죽을까. 앞산에서 뻐꾹뻐꾹하고 울어야 하는 개구리와, 뒷산에서 개굴개굴하고 울어야 하는 뻐꾸기는 어느 쪽이 더 빨리 복장이 터져 죽을까. 나는 전혀 영양가 없는 자문자답으로 시간의 김밥을 말아먹고 있었다.

- 여자와 대화를 할 때는 헌팅이건 미팅이건 모팅이건 일단 궁금증을 유발시켜라. 직업을 물었을 때도 액면 그대로 까발리지 마라. 관심이 반감되는 수가 있다. 가령, 닭갈비집을 운영합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면, 국민건강증진에 기여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정도로 얼버무려두어라. 얼마나 탄력있는 대답인가. 여자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직업을 추정해 보다가 가장 자신의 허영심을 충족시켜주는 직업으로 의식을 고정시키게 된다. 물론 진짜 직업을 알고 나면 왜 자신을 속였느냐고 다질것이다. 하지만 너는 전혀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알고 보면 그녀를 속인 건 네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기 때문이다. 대학을 다닐 때부터 필도녀석은 나를 그렇게 가르쳤다. 하지만 녀석을 동조하기 위해 써먹어본 적은 있어도 나 자신을 위장하기 위해 써먹어본 적은 없었다.

- 측근들은 요즘 내가 정신이 약간 이상해졌다고 생각하는 눈치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이면 달이나 소요에 대한 이야기를 자제하고 있었다. 나는 남들이 다 알고 있는 현상을 혼자 모르고 있는 경우보다, 남들이 다 모르고 있는 현상을 혼자 알고 있는 경우가 몇 배나 더 외롭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 "한 번 맺은 인연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맺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가 없는 법이지. 어차피 인연을 맺었으니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세. 다음에 또 만나세."

-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안에 쐐기풀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쐐기풀 때문에 서로를 껴안을 수가 없었다. 껴안으면 껴안을수록 상처가 깊어졌다. 끝내 달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결국 사람들은 가슴 안에 쐐기풀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코브라나 방울뱀 따위를 사육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실리에 눈이 멀어 쐐기풀에 상처를 입든지 말든지 코브라나 방울뱀에게 물려 죽든지 말든지 한사코 상대를 끌어안고 피를 빨아먹을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 나는 조금씩 무력감이 깊어져 갔고 그러면서 조금씩 인간에 대한 혐오감도 깊어져 갔다. 소요를 만나기 전에 도대체 내 인생에 무슨 희망이 있었던가. 무력감이 장마철 먹구름처럼 내 육신을 잠식하고 상실감이 한겨울 눈보라처럼 내 의식을 점령했던 젊은 날, 이미 내 희망은 요절해 버렸다. 타살이었던가 자살이었던가. 나는 끝내 사인(死因)을 규명하지 못한 채 춘천에 붙박여 닭갈비나 팔면서 지리멸렬한 목숨을 연명해 가고 있었다.

물론 희망이야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그대로 적용시킨다면, 닭갈비를 팔아서 돈을 많이 벌겠다는 포부를 희망으로 간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학시절부터 고작 돈이 희망을 대신하는 인생을 지독하게 혐오하던 나로서는, 닭갈비를 팔아서 돈을 많이 벌겠다는 포부를 결코 희망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것은 절망이었다. 진정한 희망은 물질의 산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산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문학이라는 이름의 숲만을 바라보면서 시라는 이름의 일만의 희망을 품고 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품었던 알들은 부화되지 않았다. 모조리 무정란(無精卵)이었다. 한 번도 새가되어 숲으로 날아가지 못했다.

- 의사의 설명에 의하면, 망상은 사고의 이상현상에서 기인된 비합리적 판단이나 확신을 일컫는 용어로, 환자들은 대부분 어떤 합리적 논거로써 그 잘못을 설득해도, 절대로 자신의 주관적 확신을 수정하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인다는 것이다.

- 바깥세상보다는 여기가 더 따뜻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는 적의는 없는 것 같았고 모함도 없는 것 같았고 기만도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달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면 환자들 모두가 믿어줄 것 같았다. 의학적으로 정상이라고 판단되는 사람들은 가슴이 정서적으로 메말라 있었고 비정상이라고 판단되는 사람들은 가슴이 정서적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입원해 버릴까 하는 충동을 받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입원해 버리면 바깥세상이 볼 때는 달의 존재를 스스로 부인하고 망상을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차피 나는 달이라는 이름의 등대를 잃어버린 표류자. 일엽편주로 끊임없이 망망대해를 떠도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모월증후군을 앓으면서 정상인 속에도 섞이지 못하고 비정상인 속에도 섞이지 못하는 소속물명의 외톨박이로 전락해 있었다.

-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한탕주의가 신흥종교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로또는 인생역전의 동의어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으며 주식은 일확천금의 지름길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가치관도 정체성도 오리무중, 사기협잡 공갈협박, 무슨일을 해서라도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근면끝에 라면 먹고 절약 끝에 농약 먹는다는 신종 속담까지 나돌고 있었다.

- "자네는 술의 주재료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곡식이나 과일 아닌가요.", "그건 부재료지. 주재료는 아니야.", "그럼 물인가요.", "그렇지 술의 주재료는 물일세. 그거야 너무 당연한 대답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인들은 물에 대해서 당연히 알아야 할 것들을 대부분 모르고 있지. 물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질 중에서 인간의 의식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물질이지. 차를 달이거나 약을 달일 때 달이는 사람의 의념에 따라 차맛과 약효가 현저하게 달라진다네. 맹물 한 모금을 마시더라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마시느냐에 따라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네."

- 어느 날 토정(土停) 선생이 어떤 마을에 당도했다. 그 때 느티나무 아래서 장기를 두던 사내 하나가 갑자기 복통으로 배를 움켜잡고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땅한 약재가 없었다. 그래서 토정 선생은 사람들에게 급히 약탕기를 구해 오도록 하고 장기판에 놓여 있는 차(車)를 약탕기에 넣고 달여 먹였다. 그러자 사내의 복통이 씻은 듯이 나았다.

-"후세 사람들은 그 일을 두고, 차는 장기에서 장군을 부를 때 가장 많이 쓰는 기물이라 그 양기가 복통을 치료했다는 둥, 장기의 기물들은 대개 박달나무로 만드는데 박달나무는 한방에서도 복통을 다스리는 약재로 쓴다는 둥, 해석이 분분하지만 사실상 차라는 기물은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맹물에 대한 불신을 차단하기 위한 전시적 수단으로 쓰였을 뿐 치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네. 단지 토정 선생은 물에다 의념을 했을 뿐이지. 하지만 맹물만 먹였으면 아무리 토정 선생이 의념을 했어도 복통이 치료되지는 않았을걸세. 모든 사람들이 맹물에는 아무 약효가 없다고 생각하지.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거야. 그러니까 맹물만 끓여 먹였다면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약효가 없다는 의식이 토정 선생이 의념했던 물에 섞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요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것들을 헤아릴 지혜가 없어."

- 한때 인간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天動說)을 믿었다. 그리고 천동설은 1천 4백여 년 동안 태양계의 운동을 설명하는 유일한 이론으로 존속되었다. 천동설은 당시 교황청의 공인교리였다. 코페르니쿠스는 프라우엔부르크 성당의 신부였다. 하지만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구가 자전하는 행성이며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는 지동설(地動說)을 발표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당시 교황청의 공인교리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도전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지탄의 돌들이 코페르니쿠스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을까. 당시에도 인터넷이 있었다면 마녀사냥을 좋아하는 네티즌들이 온갖 욕설로 코페르니쿠스를 성토하기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신부가 되더니 겁대가리가 없어졌구나 코페르니쿠스.
니 이론대로 지구가 돈다고 치자, 하지만 어지럽지 않은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거냐.
엉터리 신부야 아가리 닥치고 딸이나 잡다가 자빠져 자거라.
즐이다 씹새야.
너의 무뇌아적(無腦兒的) 발상에 나는 심장마비를 일킬 뻔했어.
개쉐이, 그렇게 뜨고 싶었냐.


-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의 권력은 진실을 전파하려는 자들을 매장시키고 싶어하는 특성을 나타내 보인다. 그들이 전파하려는 진실이 어떤 분야에 해당하는 것이든 무조건 적대적인 관계로 해석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실체가 진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하지만 수많은 지탄의 돌들이 코페르니쿠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그 순간에도 지구는 돌고 있었다. 갈릴레이가 시력을 잃어버린 채로 집필에 몰두하던 그 순간에도 지구는 돌고 있었다. 그리고 온 인류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에도 지구는 돌고 있을 것이다.

- "코드가 일치했다는 말은 마음이 빛깔이 같아졌다는 말과 대동소이하지. 마음의 빛깔이 같아지면 정서의 합일이 이루어지고 정서의 합일이 이루어지면 비로소 소통이 가능해지는 법이야. 코드가 일치하기 전에는 서로 마음의 빛깔이 판이하게 달랐던 거야. 환자들은 회색조의 빛깔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대단은 청색조의 빛깔을 가지고 있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한쪽은 무채색 계열이고 한쪽은 유채색 계열이었어. 그래서 소통이 불가능했던 거지."

- 백하연은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사이다를 보니까 생각이 나더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사이다에서 발생한 기포를 보고 사이다가 알을 깐다고 표현하다니, 내가 생각했던 머리카락이나 코딱지에 비하면 얼마나 거룩한 발상인가. 아이들은 모두가 천사요 시인이다. 그러나 학교하는 이름의 빵틀 속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천사로서의 자질이나 시인으로서의 자질은 묵살되고 오로지 붕어빵으로 전락하는 방법만 이수된다.

- "당신은 치열한 생존의 정글에서 낙오된 패잔병이야. 물질만능으로 치달아가는 세상을 가슴 아파하는 척 엄살을 떨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패잔병의 치졸한 자기변명에 불과하지. 모두들 황금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도대체 시 나부랭이가 무슨 쓸모가 있다는 거야. 당신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어. 당신은 밥이나 축내고 살아가는 잉여인간이야."

- 문제는 세상의 흐름이다. 양심이나 도덕을 밑천으로 살아가면 능력 없는 놈으로 간주되고 반칙이나 암수(暗數)를 밑천으로 살아가면 능력 있는 놈으로 간주된다. 인간답게 살면 문전걸식이 기다리고 있고 짐승같이 살면 부귀영화가 기다리고 있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들이 세상의 흐름을 이렇게 뒤집어놓았을까.

-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인간만큼 의식과 물질이 잘 조화된 생명체를 만들어내기도 힘든 법이라네. 예전에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가슴에 빛을 가득 품고 있었지. 그 빛은 자신 이외의 것들을 많이 사랑할수록 밝아지는 법이라네. 허나 지금의 인간들은 자신조차도 사랑할 술 모르는 상태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네. 인간들은 달이 태양빛을 반사해서 밤에도 빛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네. 달은 인간들의 가슴에 간직되어 있던 빛을 반영하던 천체였네. 결국 인간들의 가슴에서 빛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하늘에서 달도 사라져 버린 거라네."

- "자네가 산을 바라보는 순간 산도 자네를 바라보고 자네가 호수를 바라보는 순간 호수도 자네를 바라보고 자네가 달을 바라보는 순간 달도 자네를 바라본다네. 자네가 눈길을 주기만 하면 삼라만상이 모두 자네를 본다네. 자네가 하늘을 날아가는 한 마리 백로를 보았다고 하세. 그 순간 백로의 눈은 다른 곳을 보고 있겠지. 그러나 백로의 의식은 자네를 보고 있네. 하지만 인간은 예외일세. 인간은 의식이 육안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자네가 바라본다는 사실을 감지한 못한다네."

- 하늘이시여, 비록 미욱하여 남을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린 적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부디 그 가슴까지 살피시어 오늘처럼 달빛이 충만하게 하소서.

                 ---------- 책의 본문증에서 내 눈길을 끈 부분들을 스크랩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