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농부와 독서

상도 - 최인호

금오귤림원 2010. 8. 12. 13:33

* 지은이 : 최 인 호
1945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1963년 서울고 2학년 재학시절 단편 《벽구멍으로》
          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 입선.
1967년 단편 《견습환자》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되어 문단에 데뷔.

- 현대문학상 수상
- 이상문학상 수상
- 카톨릭문학상 수상

*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도시의 사냥꾼》,
《지구인》, 《깊고 푸른 밤》, 《잃어버린 왕국》,
《길 없는 길》, 《사랑의 기쁨》, 《내 마음의 풍차》,
《상도》, 《해신》,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제왕의 문》, 《불새》, 《유림》 등.

* 산문집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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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판 1쇄 발행 : 2006년 4월 17일
1판 4쇄 발행 : 2006년 4월 26일

펴낸곳 : (주)여백미디어
주   소 : 서울 용산 한남 1-364

전3권 / 288쪽, 272쪽, 391쪽 / 각 12,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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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영배(戒盈杯). 그 한개의 잔에 이렇듯 수 많은 이야기들이 담길 수 있을 줄, 소설의 내용보다도 작가의 그 탁월한 이야기 솜씨에 놀라고 또 놀랐다.

조선 후기, 의주상인 거상 임상옥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소설은, 작가의 말처럼 이 땅에 존경할 수 있는 상업인이 없다는 한탄스런 푸념에서 출발했다.

"직업의 귀천은 없다"라는 말로 아무리 세상을 속이려 한다해도,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동안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말처럼 그 직업적 신분은 떨어낼래야 떨어내지 못함이 상식일것이다.

지식인을 최고의 위치에 놓아 만인의 존경과 흠모를 보내는것과는 달리 장사치는 그 부르는 말에서 엿볼수 있듯 가장 바닥에 놓아, 비록 그 금권에는 아부를 하지만 내심으로는 천시하고 멸시하는 인정은 동.서.고.금을 통해 어디서든 같을 것이다.

대개의 장사치들이 그렇듯, 그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형태에 기인하리라.

소설의 전편에서는 상인으로서의 임상옥에 대한 면 면을 세밀히 조명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인간적인 면들과 수행자적인 측면을 거의 대부분의 지면을 빌어 나타내고 있다.

그 역시 상인이기에 대개의 장사치들처럼 그의 이익을 위한 일반적인 방법과 수단들을 동원하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존경할 수있고, 흠모할 수 있는" 상인으로 그를 뽑았고 그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써 내렸다.

작가의 경력과 그간의 작품들을 보아, 이렇듯 자신있게 상인의 이야기를 펼쳐 나간 것을 보면 분명 임상옥은 이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참다운 상인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을것이다. 나 역시, 작가처럼 왜 상인은 존경받지 못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기에, 그리고 아직도 그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기에 그 믿음은 어느새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은가.

작가의 글솜씨도 글솜씨지만, 그의 해박하고도 깊이있는 지식에 더 없는 탄성을 지르게 했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불교적 색채와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가끔씩 등장하는 바다건너, 또는 국경넘어의 지식들도 포함하자면 의아함까지 들 정도이다.

우명옥과 석숭스님, 임상옥과 박종일, 그리고 송이, 김정희.... 또한 중국의 당대 최고의 문장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문장과 시, 요즘은 흔히 고전이라 하던가? 그것들도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것은 석숭스님의 계영배가 아니었던가. 밝혀질 듯 밝혀질 듯 하면서도 요리 피하고 저리 피하며 그 속에 담긴 내막을 쉽게 밝히지 않아 끝내 소설 전집을 한 숨에 읽어 버리게하지 않았던가.

결국, 석숭스님은 도공이었으며, 그 도공에 의해 계영배가 만들어졌고 어찌해서 그 잔은 가득 채운 술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지 밝혀지기는 하지만 책의 마지막장을 덮는 그 순간까지 조금도 긴장감을 풀지 못했다.

70퍼센트 이상 채우게 되면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두 사라지게 하는 신비의 잔 계영배.
가득 채움을 경계하는 잔 이라는 교훈적 뜻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이론과 실제가 맞아 떨어지는 잔.

두 가지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는, 사람들 모두들 말하는 대로, 글자 그대로 "가득채움을 경계한다"는 말의 의미이며,
둘은, 눈으로 보고 말로만 하는 교훈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되는 실천적 의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너무 많아, 선택할 수도 없을만큼 혼재하는 매스미디어 등으로부터 홍수보다 더 큰 양의 정보를 접하면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그야말로 립서비스정도의 지식은 머리가 터질 정도로 쌓아 두고 살지만, 정작 그러한 것들을 실체화 하거나 실천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치부하고 산다.

입술을 떠나 공중에 흩어진 말과 말들은 어차피 상대의 귓가에서 그 순간만 머물뿐 마음속에 각인되지 않는 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일까. 실체화 하거나 실천하기에는 너무도 귀찮거나, 어차피 그렇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차피 대인관계. 깊은 관계보다는 가벼운 관계가 훨씬 이익이며 손 쉽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결국 말들의 홍수속에서 우리는 사상누각을 지으며 살아간다고 정리할 수 있을것 같다.

계영배가 주는 교훈 두 가지.
정녕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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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손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이더냐"
"내 손에 들어있는 것은 칼이나이다"
"그럼 그 칼이 사람을 살리는 칼이더냐, 아니면 죽이는 칼이더냐."
"그 칼은 사람을 살릴수도, 죽일수도 있는 칼이나이다."

거대한 몸집의 코끼리와 마주할 때도, 밀림의 왕자 사자나 호랑이와 마주할 때도, 사람은 그렇게 쉽게 그 사납거나 덩치가 큰 동물들로 부터 공격당하지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두 팔과 손이 있기에 그렇지 아니할까?

그 손안에 비록 사람에게 보이는 칼은 없을지라도 사납고 덩치가 큰 그 동물들은 그 칼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내 두 손안에는 무수한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그러나 그 반대로 무수한 생명을 살릴수도 있는 보검이 들려 있는것이다.
그것도 두손 가득히...

살리고 죽이는 것은 내 안에 있었다. 궂이 원효대사님의 큰 깨달음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만법유식(萬法唯識) 를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이미 세상 만물은 내 마음속에서 만들고 내 마음속에서 사라질뿐.

신이시여.
부디 내 손안에 들어 있는 칼이 무릇 만 생명을 살리는데 쓰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