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고전의 향기

[2009.09.30 (수) --비] 天道無親, 常與善人 ... (사마천의 후예들)

금오귤림원 2009. 9. 30. 20:23
“或曰... ‘天道無親, 常與善人.’ 若伯夷•叔齊, 可謂善人者非邪? 積仁潔行如此而餓死! 且七十子之徒, 仲尼獨薦顔淵爲好學. 然回也屢空, 糟糠不厭, 而卒蚤夭. 天之報施善人, 其何如哉? 盜蹠日殺不辜, 肝人之肉, 暴戾恣睢, 聚黨數千人橫行天下, 竟以壽終. 是遵何德哉? 此其尤大彰明較著者也. 若至近世, 操行不軌, 專犯忌諱, 而終身逸樂, 富厚累世不絶. 或擇地而蹈之, 時然後出言, 行不由徑, 非公正不發憤, 而遇禍災者, 不可勝數也. 余甚惑焉, 儻所謂天道, 是邪非邪?”

“어떤 이는 말한다. ‘하늘의 도는 특별히 친하게 여기는 대상이 없고, 항상 선인(善人)의 편에 선다.’라고. 그렇다면 물어 보겠다. 백이와 숙제는 선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없는가. 선인이라고 그대도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토록 인덕(仁德)을 쌓고 고결한 품행을 보여 주었는데도 굶어 죽고 말았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공자(孔子)의 70 문도(門徒) 중에서도 안연(顔淵)은 특히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스승이 추천까지 한 인물인데도, 끼니를 자주 거르면서 지게미와 쌀겨도 배불리 먹지 못한 채 끝내는 요절(夭折)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하늘이 선인에게 보답하는 것이 과연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반면에 도척(盜蹠)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날마다 죽이고 사람의 간을 꺼내어 먹는가 하면 거리낌없이 포악한 짓을 자행하면서 수천 명의 도당을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는데도, 끝내는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리고는 안락하게 생을 마쳤다. 그는 과연 무슨 덕을 쌓았단 말인가.

이상의 예는 너무도 유명해서 누구나 다 환히 아는 옛날의 사실이지만, 근세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들 수가 있다.

불법 행위를 일삼으며 남들이 꺼리는 일을 도맡아 범? 玖庸??종신토록 호강을 하고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여 대대로 물려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밟을 땅을 가려서 밟고 말할 때가 되어야 말을 하고 샛길을 절대로 통하지 않으면서 공정한 일이 아니면 나서려 하지 않는데도 그만 재앙과 낭패를 당하는 사람들이 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는 너무도 당혹스럽기만 하다. 도대체 하늘의 도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백이열전(伯夷列傳)〉
사마천(司馬遷)의 피맺힌 절규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1백 년 전, 중국 한 무제(漢武帝) 때에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의 〈백이열전(伯夷列傳)〉중에 나오는 말이다.

《사기》는 중국의 이른바 25사(史) 가운데 첫 번째를 장식하는 기전체(紀傳體)의 사서(史書)이다. 그 이전에도 물론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서적이 있기는 하였지만, 한 시대의 역사를 연대 순으로 기재한 편년체(編年體)의 사서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을 뿐, 《사기》처럼 몇천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서 각 방면에 걸쳐 일목 요연하게 정리해 보여 준 통사(通史)는 일찍이 없었다.

원래 《사기》는 사마천의 부친인 사마담(司馬談)이 태사령(太史令)으로 있을 때에 착수한 것이었다. 그런데 부친이 그만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나자 사마천이 그 유지(遺志)를 받들어 본격적으로 편찬 작업에 돌입하였는데, 5년째 되던 해에 궁형(宮刑)에 처해졌으며, 3년 뒤에 다시 사면을 받고 감옥에서 나와 중서령(中書令)이 되고나서 그 일을 계속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멀리 신화 시대인 황제(黃帝)로부터 한 무제(漢武帝)에 이르기까지, 도합 1백 30편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의 《사기》를 완성하고는 몇 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사기》는 본기(本紀) 12편 • 표(表) 10편 • 서(書) 8편 • 세가(世家) 30편 • 열전(列傳) 70편으로 구성되었는데, 본기와 세가는 각각 천자와 제후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고, 열전은 그 이외의 인물에 대한 행적을 담은 것이다. 그런데 불후의 명작으로 전해지는 이 《사기》의 내용 중에서도 열전이 백미(白眉)로 꼽히고, 그 열전 중에서도 〈백이열전〉이 특히 압권(壓卷)으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이 〈백이열전〉은 아마도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뒤에 지은 작품이 아닐까 하는 것이 해설자의 생각이다.

궁형(宮刑)은 오형(五刑)의 하나로서 사람을 강제로 거세(去勢)하여 생식 기능을 상실하게 하는 형벌이다. 사마천으로서는 죽음보다도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 형벌에 처해진 이유는 단지 자기의 친구인 이릉(李陵)이 5천 명의 보병(步兵)을 이끌고 흉노(匈奴)의 8만 기병(騎兵)과 용전 분투하였으나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에서 화살도 다 떨어져 어쩔 수 없이 흉노의 선우(單于)에게 투항한 것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이릉은 사마천이 존경해 마지않던 장군 이광(李廣)의 손자이다. 이 장군은 흉노가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부르면서 무서워했던 한 나라의 명장이었는데, 끝내 전공(戰功)을 인정받지 못한 채 불우한 세월을 보내다가 아랫 사람의 수모를 참다 못해 자결하였다. 사마천의 수모도 결코 그에 못지 않았을 것인데, 그는 죽음을 택하지 않고 살아 남았다. 왜 그랬을까?

사마천이 자기의 벗인 임소경(任少卿)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사람은 언젠가 한 번은 죽게 마련이지만, 죽어서 태산보다 중한 이름을 남기는 사람도 있고, 기러기 털보다 가볍게 취급을 당하는 사람도 있다.”고 심경의 일단을 토로하는가 하면, “가령 내가 이대로 죽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아홉 마리의 소에서 터럭 하나가 없어진 것과 같을 것이니, 개미나 땅강아지와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라는 울분에 찬 표현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마천은 그런 하찮은 죽음을 택하지 않고 끝내 살아 남아서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일까? 이 세상에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아닌 자기의 진정한 존재 가치를 어디에서 확인하려고 하였을까? 그것을 우리는 앞에서 인용한 백이 열전의 내용 중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속에 바로 사마천이 열전의 첫 머리에 백이를 내세워서 자신의 입장을 우회적으로 표명하려고 한 의도가 혹시 들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선인이 몰락하고 악인이 오히려 득세하는 세상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사필귀정(事必歸正)의 도리를 확인시켜 줄 수 있는 공명정대한 하늘의 도가 만약에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그나마 조금쯤 위로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하늘은 결국에 가서는 선인의 편을 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하늘은 없다. 사람들이 천도(天道)를 곧잘 말하지만, 그 천도라는 것도 결코 옳은 것은 아니다. 백이 숙제와 도척을 보아라. 그리고 지금 전개되고 있는 이 세상의 행태를 보아라. 모든 것은 우연의 소산일 뿐이다.” 윗 글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그런 것이려니 하고 체념하고서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다. 공평 무사한 하늘의 도가 없다고 한다면, 인간인 우리가 혹시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이 잘못된 역사를 우리의 손으로 심판할 수는 없을까. 그리하여 끝내는 선인이 승리하고 악인이 패배하는 하늘의 도를 우리가 대신해서 구현할 수는 없을까. 그렇다. 내가 한번 그 일을 해 보리라.” 사마천은 혹 그런 각오를 가지고 궁형을 당한 수치를 딛고 일어서서 《사기》를 집필하지는 않았을까.

이 추측이 과연 맞다면, 사마천의 의도는 실제로 성공했다고 해도 잘못된 말은 아닐 것이다. 2천 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의 붓 끝에서 모든 인물과 역사가 여지없이 정죄(定罪)되고 있으니까. 그리하여 역사의 기록이라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것인가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있으니까.

오늘날에 와서도 사마천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것이 하늘이든 신이든 다른 어떤 귀의(歸依) 대상이든 간에••••••. 그리하여 분노와 허탈과 무력감과 체념의 고비를 넘기고서 역사와 현실을 조용히 응시하며 홀로 말없이 작업을 하고 있는 사마천의 후예들이 어딘가에 또 분명히 있을 것이다.
글쓴이 : 이상현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