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고전의 향기

[2009.09.24 (목) 맑음] 王於我足矣。 而帝以何德堪之。 (아첨의 기술)

금오귤림원 2009. 9. 24. 10:02
王於我足矣。 而帝以何德堪之。
왕어아족의。 이제이하덕감지。

왕이라는 명칭이면 나에게는 충분하니,
황제라는 명칭이야 내가 무슨 덕이 있어 감당하겠느냐?
- 이하곤(李夏坤),〈아첨하는 여우 이야기[媚狐說]〉,《두타초(頭陀草)》
여우는 호랑이에게 아첨을 잘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호랑이는 기분이 좋아서 자기가 먹던 것을 여우에게 남겨주곤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여우는 호랑이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모두들 당신을 ‘산중의 왕’이라고 부르지만, ‘왕’ 보다는 ‘황제’가 더 높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당신을 ‘황제’라고 불러서 모든 짐승들에게 존귀함을 과시하는 게 어떨까요?”

“아니다. 기린은 나보다 어진데도 황제라고 부르지 않고, 사자는 나보다 용맹한데도 황제라고 부르지 않더구나. 왕이라는 명칭이면 나에게는 충분하니, 황제라는 명칭이야 내가 무슨 덕(德)이 있어 감당하겠느냐?”

이제 보니 호랑이는 나름 겸손하군요. “허허허 좋아, 아주 좋아.” 이럴 줄 알았는데 사양을 하다니. 제 능력은 헤아리지 않고 스스로를 높이다 끝내 나락으로 떨어진 수많은 역사 속 인물들과 대비되지 않습니까? 겸손, 모두가 가져야 할 덕목이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될까요? 아첨의 달인 여우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호랑이를 계속 부추깁니다.

“기린이 어질다지만 용맹은 당신만 못하고, 사자가 용맹하다지만 어진 것은 당신만 못합니다. 두 가지를 다 가진 분은 당신밖에 없는데 당신께서 황제가 되지 않는다면 과연 도대체 누가 황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에 호랑이는 기뻐하며 마침내 스스로를 ‘산중의 황제’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온갖 짐승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축하를 드렸습니다. 호랑이는 ‘여우가 나를 이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는구나.’ 생각하고는 여우를 ‘산중의 재상’이라고 부르고, 이제는 먹을 것이 생겨도 자기는 먹지 않고 모두 여우에게 주었답니다.

저자는 결론에서, ‘여우가 호랑이에게 아첨한 이유는 먹을 것 때문이었는데, 호랑이는 여우가 자기를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생각하게 하였으니, 여우야말로 아첨을 잘 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로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만, 과연 이 글이 여우의 아첨 기술을 높이 평가하려고 쓴 것일지는 의문입니다.
옮긴이 : 조경구(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