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마련된 계획서를 갖고 이낙선 당시 상공부 장관과 상의했고, 李 장관은 즉시 朴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이 때 朴 대통령은 적극적인 찬의를 표하면서 "기왕에 시범공고를 설립하려면 동양 최고의 학교를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이후로부터 이 학교는 「동양 최고의 공고」라는 레테르가 붙게 된다.
李 장관은 상공부로 돌아오자마자 「우수한 기계 기술공」에 대한 정의부터 해보자고 했다. 이 때 합석했던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상태라고 입을 모았다. 李 장관이 먼저 "일본의 기술자 근성(根性)과 같이 우리도 오기가 있어야 한다"라고 했지만 어딘가 어색하다고 느껴져서, 결국에는 「자기 자식을 돌보듯 정성을 들여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쪽으로 정의가 내려졌다. 두 번째가 기술에 관한 사항이었는데, 「정밀가공을 할 수 있는 능력 소지자」로 낙찰되었다. 끝으로 한국 남자 고유의 나쁜 기질, 즉 처음에는 열심히 하다가 도중에 적당히 해버리는 습성이나 끝마무리 작업을 등한시하는 일은 없애야 했다. 그래서 「설계도면을 율법(律法)으로 알고 속임수 없이 끝까지 정직하게 작업하는 사람」이라는 정의를 내렸다.
즉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데 필요한 기계 기술공은 「정성 들여, 정밀하게 도면대로, 끝까지 정직하게 작업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이때부터 「정성, 정밀, 정직」은 이 학교의 교훈이 되었는데, 학교가 설립도 되기 전에 교훈부터 먼저 정해졌던 것이다. 세 단어에 모두 「정」자가 들어있어 「3정주의」라고 했으며, 학교의 이름도 (가칭)삼정공업기술고등학교라고 했다.
이 안건은 그 해(1970년) 7월 21일부터 23일에 걸쳐 개최된 제4차 한일경제각료회의에 제출됐는데, 양국 각료는 원칙적인 합의를 했고 학교 설립을 위해 조속한 시일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했다(註: 이 회담 때 김학렬 부총리는 4대 핵공장 건설에 대해 협조 요청을 했다).
1970년 11월 4일 일본 조사단(단장: 문부성 모로사와(諸澤正道) 심의관) 8명이 내한해서 10일간 조사 후 귀국했다. 이 때 필자는 조사단에게 기계를 위주로 한 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데, 기계과도 전문분야별로 세분해서 충분한 실습교육을 실시하여 졸업과 동시에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기술공을 양성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학교 규모는 제1차년도에는 기계공작과 120명, 판금용접과 60명, 주물목형과 30명, 금속공업과 30명, 전자과 120명 등 합계 360명으로 하고 이후 400명까지 확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학교 부지는 7개 지역을 조사한 후 경상북도 구미전자공업단지로 결정하였다. 1971년 3월 학교 부지 6만 평 확보, 동년 4월 20일 정지공사 착공, 그리고 1971년 8월 16일에는 문교부로부터 금오학원 설립인가가 나왔다. 학교명도 가칭 삼정공업기술학교에서 금오공업고등학교로 정식 결정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설립자였는데, 朴 대통령은 이 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쏟아 몇 번씩이나 현장을 방문했다.
73년 2월 20일에는 「金烏공업고등학교」라는 현판용 휘호, 76년 1월에는 「정성, 정밀, 정직」이라는 교훈을 휘호로 썼다.
이렇게 모든 일은 풀 스피드로 진행돼 나갔다.
<오원철 전 대통령 경제 제2 수석비서관 - 한국형 경제 건설 중>
2003/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