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농부의 세상

과연 그랬을까? 내 생각엔...

금오귤림원 2005. 6. 12. 02:17

다음에 기술하는 내용은, 전적으로 내 생각이다. 어떤 근거도 자료도 없이
단지, 과거 내가 공부했던 내용과, 그 비슷한 아래에 올린 글들을 가지고
유추해 보자면,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보곤 한다네.

내가 만일 대통령이라면,

드 넓은 전라도 지역의 땅을 다 갈어 엎고, 거기다 공업입국의 최선봉이 될 수 있는 경, 중공업 단지를 세울 수 있을까

반대로, 대부분이 산악지역인 경상도 지역을 다 갈아서 평지를 만들고 농경지를 만들 수 있을까

몰라, 난 못할 것 같네 그려.

일국의 대통령!.....

누구 말 마따나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자리는 아니지 않는지
백년대계와 그에 따른 고민, 우선순위....등 등 등....

내가 알고 있는것과 모르고 있는 것들...모두...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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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제기한 애석함을...난, 이렇게 연장해서 생각하곤 한다네.
바로 금오공대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왜 하필이면, 금오공과대학이 금오공고 바로 옆에, 실업계고등학교 부지면적
보다, 모든 시설면에서조차 부족함을 느낄 정도이면서도, 왜 하필이면 그 때
1회 입학생을 받아들여야 했을까

1기 선배님들의 전역시기에 맞추어야만 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내 생각을 꺼내 보겠네.

우선 먼저 해야할 말씀이 있다네.

바로 우리 자신, 바로 자네가 언급한 단순 기능공이나 하급 기술하사관에 대한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다네.(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뿐일세, 그 어느곳에서도 이에 관한 자료나 근거를 찾지 못했다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후반기까지 내 어린시절은 제주도가 아니었다네. 강원도 춘천의 소양강 기슭의 빈민촌이었지. 그 어린 시절의 아련한 기억으로 동사무소에서 배급하는 무명포대에 성조기를 두른 손과 태극기를 두른 손이 악수하는 모습만 인쇄된, 그리고 뭔지는 모르지만 암튼 영어와 국어로 무슨 원조 어쩌구..하는 그 무명포대에 밀가루가 담겨있었고, 그걸 주식으로 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네. 그리고 그네들의 버터가, 조선간장과 어우러져 참으로 맛나게 비빈밤을 먹었던 그런 기억이 있다네.

강원도 춘천 역시 미군 기지가 있었고, 시내를 벗어나면 온통 군 부대 투성이었던 기억도 나고....

그 때의 우리 군은 어디까지나 보병 중심의 전투력이었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고, 기술적 전투력은... 글쎄, 비록 어리지만, 어른들의 이야기들이 생각도 난다네. 기름을 빼돌린다느니...부속을 빼돌린다느니...
모든 훈련은 형식이었고...

아무리 하늘을 찌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한 손에 쥐었다 한들, 대통령 말 한마디로 그 막강한() 군을 개혁할 수 있었을까 군 본연의 사명인 전투력 유지, 또는 발전과 기술적 현대전을 대비한 전투력 향상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길게 설명하려 하지 않겠네.

난 자신있게 내 스스로에게 말 하곤 한다네.

바로 우리들이 그 군을 개혁했다고 말일쎄.

우리가 훈련은 육군에서 하고, 왜 전혀 생소한 해군 및 공군으로 배속을 받아야 했을까...

부정과 부조리를 참지 못했던 많은 우리 선배님들과 후배님들, 그리고 우리들,
20여년이 훨씬 넘도록 군 장비를 만져온 고참 군 선배님들과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앳된 얼굴의 우리 동문들이 동등한 실력, 아니 오히려 더 우월한 정비및 운용능력을 발휘할 때, 그 들은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바로 그들은 직업 군인이었음을 상기해 둘 필요가 있을것 같다네.

우린, 군 내부의 부정, 부패, 부조리와 싸우며, 군 기술 현대화 및 정예 기술군을 다지는 그야말고 초석이었다고 자부한다네. 물론 완전한 희생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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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대학이 학부제로 전환되어 운영이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은것 같네.
잠시 우리 모교에 입할할 당시로 되돌아 가 보지 않겠나

1학년 초, 우리는 그 자랑스런() 실습복 왼쪽가슴에 내 전공 마크를 달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네. 아닌가 좀 희미한데...

암튼, 1학년 1년동안, 우리는 기계공작과, 금속공업과, 판금용접과, 전자과 이렇게 4개 학과를 모두 공부하는 이른바 공통실습을 했지.
2학년 1학기에 비로소 자기 전공이 결정이 되었지만, 그 역시 세부 전공은 아니었고, 학과 공통실습에 다시 돌입하고, 아마도 2학년 2학기 쯤에 완전한 내 전공이 확정될 수 있었지.

아마도 지금의 우리 대학이 이 비슷한 제도로 운영되는것으로 안다네.
바로 학부 시스템이지.

우린, 이미 1970년대 초에 그 제도로 공부를 했네.
그 당시 문교부 공인 교과서를 사용했었나 아닐쎄.
우린 우리만의 교재가 있었네. 바로 금오공업고등학교 출판부에서 인쇄한 우리만의 교재....

일반 대학에서 이수할 정도의 이론적 무장과 함께 최고의 장비로 실무에서 바로
응용 가능한 실습을 우리는 이미 익히고 있었다는 말씀일세.

이론과 실무로서 완전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정책의 우선순위에 의해 먼저 군으로 배정된 것으로 생각한다네. 군에서 5년간 어찌 되었건 최고의 장비들을 실제 정비하고 운영하는 업무를 통해 완전한 기술인() 기능인()으로 재 탄생될 수 있었으니까!

다시 한 번 대통령이 되어 보기로 함세.

자네가 대통령일세. 자네라면, 그런 우수한 인재를 그냥 거기에 둘것인가
단순 기능은 부가 가치가 적지 않을까

실무 능력이 전혀 없는 맹목적인 이론으로만 무장한 기술자가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확률이 높은까, 아니면, 금오출신의 능력을 지닌상태에서 재교육을 통한 기술자가 더한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까!

답은 명확하다고 생각하네.

그 연장선상에 금오공과 대학이 있지 않을까

왜 하필이면, 금오 5기생이 졸업하면서 금오공과 대학이 첫 회 입학식을 치렀을까 왜 하필이면, 금오 1기생이 군을 전역할 때 금오공과대학이 첫 회 입학식을 치렀을까

물론 과대 망상증에 걸린 나 만의 무식한 발로 일수 있겠지만, 한 번 쯤 생각해 봄직 하지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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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 능력을 지닌 기능사들이 재 교육을 통한 설계능력과 고도의 기술 능력을을 배양할 수 있었다면, 비록 내 생각이지만, 지금쯤은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적 능력은 세계최고를 뽐내고도 남았을 것이라 생각한다네.

입안이 잘 못 된 것이 아니라, 입안자의 심도있는 뜻을 후속 정권에서 완전히 묵살했던것은 아닌지, 아니면, 아예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아닌지...

알 길이 없다네.

301 학군단!
그 기록은 참으로 애석하게도 남아있지 않다는 얘기를 종종 듣고 있으니 말일세.

오늘은 그만 함세!

^_^*

2003/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