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烏工業高等學敎(IV)
금오공고에는 전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학비도 면제했고 기숙사도 공짜요, 교복이나 학용품도 무료로 지급했다. 그리고 「정성, 정밀, 정직」, 즉 3정 교육에만 총력을 경주했다. 교사들은 열성을 다했고, 학생들도 열심히 공부를 했고 고된 실기훈련에도 견디어 나갔다. 그 결과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년 후부터 정밀기계 가공사 자격을 따기 시작한 것이다. 놀라운 성과였다.
「우리나라 국민은 ▲ 중학교 졸업 후 공업고등학교에 입학시키고, ▲ 전공분야를 정한 후, ▲ 3년간 전문학과를 가르치고 실기를 훈련시키면 ▲ 정밀가공을 할 수 있는 우수한 기계기능사로 양성시킬 수 있다」는 참으로 값진 증명인 것이다. 이것으로 중화학공업을 발진(發進)시키는데 결정적인 애로사항이 해결된 것이다.
정부는 자신감을 가지고 금오공고와 같은 학교를 증설해 나갔다.
그러던 중 1976년 9월 부산에서 전국 기능경기 대회가 개최하게 됐다. 그런데 이때 일본에서 요청이 왔는데 일본국가 대표선수(27명)도 이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식출전은 아니고 동일한 과제에 의한 동일한 조건 하에서 평가만 받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에 대해서 대회준비위원이나 각 공업고등학교에서는 대환영이었다. 각 선수들은 자신만만했으며 한번 붙어보자는 의욕이 대단했다. 그래서 불붙는 경쟁이 일어났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특히 주목할 것은 「정밀기기제작 종목」인데, 일본선수가 74.6점, 우리선수는 88.7점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시아게" 정신이 없어 금형은 만들 수 없다던 「프레스금형 종목」에서 일본선수가 83.0점, 우리선수가 89.0점이었다.
이로서 "한국인은 정밀작업을 못하는 민족이다. 그래서 기계공업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오판은 완전히 불식됐다. 그 후 일본인은 이런 발언을 하는 이가 없어졌다. 1976년이라면 금오공고가 개교(1973. 3)한지 불과 3년 반이 경과했을 때이다.
우리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다.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는 민족인 것이다. 朴 대통령은 "조국근대화는 곧 나 자신을 위한 것이며, 우리들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과 의욕을 환기시킴으로써 스스로 국가건설의 대열에 혼연히 참가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지금 우리는 조국의 근대화라는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자원과 인력과 기술을 총동원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이를 습득한 기술인들이다. 우리는 우선 공업고등학교를 대폭 증설해서 우리 국가가 요구하는 실기능력을 착실하게 갖춘 성실하고 자격 있는 기술자를 풍족하게 양성해야 하겠다. <어느 나라가 기술인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느냐, 그 인력의 질이 어느 나라 것이 가장 높으냐> 이것이 국제시장에 있어서 경쟁의 승패를 결정하게 된다"라면서 「년간 기술인력 5만명 양성」을 재촉했다(註 : 여기에 대해서는 방위산업을 설명하면서 이야기하기로 한다).
<오원철 전 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 - 한국형 경제건설 모델 중>
2003/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