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烏工業高等學敎(II)
학교 규모는 학교 부지가 195,227㎡(59,159평)이고, 건물 연건평이 28,809㎡(8,730평)이었다. 여기에는 본관(사무실, 교실, 실험실)이 9,702㎡, 실습동이 5,876㎡, 기숙사 건물이 7,821㎡, 체육관 겸 강당이 1,765㎡, 식당 및 목욕탕 1,426㎡ 등이 포함돼 있었다. 실험 실습 교실도 40개 교실이나 된다.
이러한 시설을 하기 위해 일본 해외협력기금에서 3년간(1971년 12월부터 74년 9월까지)에 걸쳐 11억 8,700만 엔이 지출됐는데, 주로 교육실습기재 구입대금이었다. 그러나 실습용 기계가 조금 부족하다는 보고를 받고 필자는 한국에 진출해 있던 일본 회사인 미쓰이(三井)와 미쓰비시(三菱)에 부탁해서 1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실습기재를 기부받았다. 또한 한국인 교사들의 훈련도 일본에 파견해서 실시했으며, 8명의 일본인 실기교사도 제1회 졸업생이 나올 때까지 3년간 파견 받았다(註: <도표 7-6> 참조).
이 돈은 모두 일본의 기술원조자금에서 지출되었다. 이런 것을 모두 합치면 일본측이 부담한 액수는 총 14억 6천여만 엔(¥)으로 당시로서는 실로 막대한 투자였다. 금오공고는 시설 면이나 교사진 확보 면에서 동양 최고의 공업고등학교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학생들에 대한 교육 목표는 「정성, 정밀, 정직」의「3정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일종의 정신개혁운동이다. 3정주의를 학생들의 몸에 배게 하려면 정규 학교 교육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전 학생을 기숙사에 입사시키고 3정주의를 주입시키기로 했다(註: 이런 이유로 이 학교에서는 다른 학교에 없는 운영 사항들이 많이 눈에 띈다. 기상시간은 아침 6시 30분이고 밤 11시에 취침한다. 기숙사에서의 생활교육 내용 중 몇 가지 예를 들면, (1) 인사지도(하급생 인사하기, 상급생 답례하기, 동급생간 인사 주고받기, 방문 손님에게 인사하기), (2) 등하교지도(보행지도, 자세지도, 복장지도), (3) 식사지도(식사시간 지키기, 식사예절, 음식물 아끼기), (4) 청소 및 정리정돈(휴지 안 버리고 모으기, 옷장 및 침구류 정리정돈, 책걸상 정리정돈, 자발적 청소, 청소도구 정리정돈, 환경미화 정리), (5) 몸 청결지도, (6) 복장지도(피복세탁, 복장 단정히 착용, 신발 바르게 신기, 손수건 휴지 갖기, 용의 복장검사), (7) 실내정숙 지도(실내정숙, 실내 좌측통행, 자습지도), (8) 시설물 애호지도(파손물 스스로 고치기, 내 물건처럼 아껴쓰기, 화재예방), (9) 물자절약지도(전기 아껴쓰기, 수돗물 아껴쓰기, 지급품 아껴쓰기), (10) 자기 지도능력 배양 등으로부터 「올바른 직업 윤리관을 갖자」, 「긍정적인 자세로 책임과 임무를 다하자」, 「교칙을 바르게 알고 지키자」, 심지어 「전교생이 태권도 유단자가 되자」라는 항목도 있었다. 개교이래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는 교육 지침인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옛날 이야기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일까).
금오공고의 신입생 선발에서는 시험성적을 기준으로 삼지 않기로 했다. 우수한 기술인이 되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은 오기 있는 학생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국 각 중학교장의 추천으로 성적 10% 이내의 우수학생을 각 시도 교육위원회를 경유하여 1차 선발하고, 적성검사, 정밀 신체검사 및 면접으로 최종 선발했다. 그리고 공납금 전액이 면제되고 교과서와 피복을 지급하고 전원 무료로 기숙사에 입사시키는 등 각종 장학혜택을 주기로 했다. 그 결과 전국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들었는데, 한 예로 1976년 신입생의 경우 400명 모집에 126명이 중학교 졸업때 수석을 했고, 256명이 상위 5% 이내였고, 10% 이내는 불과 23명이었다. 이런 경향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오원철 전 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 - 한국형경제건설모델 중>
2003/1/19